김국진 자서전

 

                                                                                                            이제 가야할 길                                                                                                                                                                                

                                                                                                                                                                                               김국진

안암골의 청춘

 

1970년에 입학한 고려대 정외과,  안암의 언덕에 겨레의 정성으로 쌓아 올렸다는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이란 곳에서 꿈을 키웠다. 경북 상주라는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촌사람이, 반년동안 농사까지 짓다가 서울에 와,  정외과 1학년 과대표를 맡으면서 학생운동에 말려들게 되었다. 그때 고대에는 한사회(한국 민족 사상 연구회)라는 이념 서클이 있었다. 당시, 최영주가 회장이었고, 윤준하가 4학년, 정외과 조교인 정성헌이 한사회의 선배였다. ‘약소민족의 설움에서 벗어나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통일된 조국을 만들어 살아보자’ 는 꿈을 그리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늘상 노래하였다.

 

유신 1년 전인 71년 봄에는, 정부가 대학을 병영화 하기 위한 교련제도를 대폭 강화하였고, 창의와 자율이 생명인 대학에 상명하복만 허용되는 군사교육이 웬 말이냐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시 한사회 회장인 오흥진을 중심으로, 전 회장인 최영주와 서정규가 총학생회와 힘을 합쳐 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나와 제철군이 함께 행동대장을 자처하여 적극 참여하였다.

 

5월 어느 날, 내가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나자, 시골에 계시던 아버지가 학교까지 찾아왔다. 내 손목을 잡고 “야야! 대학 안 나온 나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대학 안 나와도 된다. 학교 그만두고 집에 가자.”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애걸에,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던 버스에서 맡던, 차창 밖 보리밭 똥 내음, 그 훈훈한 고향의 봄바람 내음새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10월 16일 아침, 내 방 앞으로 총검을 든 예비군들이 왔다 갔다 해서, 예비군 동원훈련을 하는 줄 알았다. 잠시 후 다부진 남자가 나타나 “김국진씨, 나랑 같이 갑시다. 나 상주 보안부대장인데,  조사할 게 있다고 모셔오라는 상부의 명령이요.” 라고 하였다. 예비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토바이에 실려 상주 오토바이상사로, 또 대구의 태백공사로, 서울 경복궁 옆 어느 병원건물에서 호텔로 간다는 지프차로 옮겨졌다. “빙고호텔로 모셔.” “ 옙” 사실 그때까지 호텔에 가 본 경험이 없는 순진한 나는, 군인들이 학생들을 웬 호텔씩이나 모시고 가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언덕배기를 오르는 차 소리, 덜커덩하고 철문 여닫히는 소리를 들은 후, 아담한 단층 건물에 내려졌다. 인도된 호텔방이라는 곳은, 천장에 형광등 하나와 모포 한 장, 내가 들어온 철문 하나밖에 없는 지하의 철창 방이었다. 다음날 마음씨 좋은 듯 보이는 취조관이 “이 곳이 그 유명한 간첩 잡는 감방인데, 그 아무리 악독한 놈이라도, 일주일만 잠 안 재우면 다 불게 된다. 그러니 고생하지 말고 빨리 사실대로 다 불게.”하고 겁을 주었고, 내 뒤쪽에서 관전하던 인사가 여기저기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일주일간 강제구금당한 뒤 성북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성북서로 온 학생들이 모두 석방되었는데도, 나는 별도로 구금되었다가 다음날에야 사복형사와 동행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함께 내려온 형사는 내가 있던 절에서 함께 기거하며, 그 동네 사는 내 친구들과 꿩 사냥하고, 가재 잡고, 담근 술 얻어 마시고 놀면서 돌아갈 생각을 않았다. 내가 머리와 눈썹을 밀고, 승복을 입고 목탁 치는 사진을 한 장 찍어 주었더니, 2주 후에야 “다른 학생들은 거의 제적당하고 강제 징집되어 군대 갔는데, 국진씨는 호적상 만20세 연령미달로 징집영장 발부가 안 되어, 내가 그간 함께 동행하여 관찰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었네요.”하고는 서울로 돌아갔다.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군대에도 못간 나는,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으로 대학에 군사문화를 이식하기 위한 교련에는 반대했지만, 대한민국 남자로서 차제에 국토방위의 의무를 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공군에 자원입대하였다.

 

 

위수령 다음해인 72년 10월, 유신체제가 들어섰다. 위수령 때 해산당한 한사회의 후신인 등림회는, ‘야생화’란 유인물을 뿌리고 ‘검은 10월단’이라는 반국가단체 조직을 결성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제철, 최영주, 유영래 등 10여명이 투옥됨으로서 일망타진 당했다. 다른 이념 서클인 한맥회도, ‘민우‘지 사건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는 등 쑥대밭이 되었다. 유신정권 초, 고대의 한사회와 한맥회가 조작된 혐의로 반신불수가 되어, 대학의 학생운동세력이 철퇴를 맞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당시 고대 정외과에서는, 타 대학과 다르게, 유신체제 하에서 금기시되는 사회주의와 중국 공산주의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였다. 김상협 교수의 모택동사상 강의에서는, 중국공산당의 결성과 대장정, 국공내전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전략전술,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죽의 장막’ 안의 내용을 소상히 분석하고 알려주는 수업으로,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김영두 교수의 동양정치사상사 강의에서는, 당시 남북한의 정치체제는, 전제군주제도가 남한에서는 자본주의와 결합하고,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이라며,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나타난 독재정치체제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이호재 교수의 약소국 외교정책론 강의에서는, 2차 대전 후 신탁통치를 받아들인 오스트리아는 분단을 면하고 통일국가를 유지하였고, 국제정세에 어두운 한국은 감정 상 반탁을 앞세우고, 찬·반탁 논란을 하다가 분단을 고착화하고 전쟁까지 치르는 우를 범한 역사적 사실의 애통함을 배우게 되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politics among nations”라는 교재를 통하여,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교차 대척하고 있는 한반도가, 강대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조건, 인구수, 국토 면적 등을 고려했을 때, 남북통일이 되어야만 그 조건을 갖출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국토방위의 의무를 다하고 나자, 복학이 되었고, 아련한 추억 속에 그렇게 졸업을 하였다. 안암골 학창시절의 경험은, 내가 노동운동이라는 격랑의 세월을 견디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국선도 입문

 

 

내가 국선도에 입문한 것은 79년 2월1일이었다. 77년 대학을 졸업한 후에 금융연수원에서 10개월가량 근무하고는, 직장생활이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원초적 욕망인 배고픔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며, 제철 군과 함께 당시 정릉에 있던 남곡선원에서 21일 과정의 단식 코스에 참여해, 원초적 욕망의 절제력을 길렀다. 그리고 78년 8월말 공개경쟁시험을 치루고 대한보증보험에 입사를 하였다. 몇 달 지나니 다시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지? 내가 무엇을 하자고 했던가?“ 이런 고민 속에서, 정신 수련을 위해 79년 2월1일 국선도에 입도하였다. 수련을 시작하고부터 마음은 더욱 느긋해 졌다. 낮에 피로하고 찌뿌둥했던 몸도, 저녁에 수련을 하고 도장 문을 나오면 상쾌해졌다. 국선도는 정신과 몸을 함께 단련시키는, 지금까지도 나의 심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수련법이다.

 

바람이 수울 불어 나를 통과하니 나도 사라진다.

내가 그 속에 녹아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할까?

선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몸에 걸리는 곳이 없고

내 마음에 맺히는 것이 없는 그 곳,

바로 거기가 선계다.

 

 

노동조합 위원장과 수련

 

 

1983년 말, 나는 압도적인 지지 속에 대한보증보험노동조합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은 물론 학교반장 선거까지 금지되었던 공포의 5공 시절에, 노동조합활동이 사회 민주화를 이루는 초석이 될 수 있다는 일념으로 활동하였다.

우리 회사 사장은 보안사 원 스타 출신이었고, 부사장은 헌병 대령 출신이었기에, 직원들은 사장과 부사장을 두려워했다. 86년 초, 부사장은 강성 노조위원장인 나를 끌어내리려 노조간부들을 불러 설득, 회유, 협박했으나, 회유당하지 않았다. 4월경에는 회원을 모집해 민속연구부라는 서클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국선도를 가르쳤으며, 수련을 통해 심신의 변화를 경험한 직원들과의 교류가, 나에 대한 신뢰로 나타나, 86년 9월, 절대적인 지지 속에 위원장에 재선이 되었다.

 

 

6월 항쟁과 넥타이부대

 

 

1985년 1월, 보험업계에서는 현대해상화재보험노동조합이 결성되어 현대왕국에 노동조합의 교두보를 구축하였고, 9월에는 한진그룹의 동양화재노동조합, 10월에는 쌍용그룹의 고려화재노동조합, 86년에는 엘지그룹의 범한화재노동조합, 87년 1월에는 신동아그룹의 신동아화재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이를 전후해서 저축추진중앙위원회, 유화증권, 비씨카드, 한미은행 등 크고 작은 금융권 노조들이 결성되었다. 이들 노동조합의 활동은 이미 재벌그룹의 벽을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노동법에서는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두어, 기업별 노동조합을 외부의 지원과 연대에서 완전히 고립시키고, 쟁의권 행사도 냉각기간과 직권중재제도를 두어서, 사실상 노동조합 쟁의활동이 불가능하도록 봉쇄시킨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노사분쟁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중에 87년 3월, 범한화재 쟁의부장 해고 복직을 위한 연대투쟁사건이 일어났다. 단위노조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금융노련의 사무실을 빌려 범한화재노조 간부들이 단식농성을 하고, 50여개 노조간부들이 지원, 연대농성을 한 것이다. 여성 조합원들을 차 뒤 트렁크에 숨겨 태우고 농성장에 합류시키다 들키기도 하고, 노조간부들이 일렬로 도열하여 탈취하려는 구사대를 뿌리치고 품에 안아 나르는 등 영화에서나 봄직한 일들이 일어났다. 당시 회사의 구사대가 빠루를 들고 점심시간에 금융노련에 쳐들어와 남자 간부들을 납치해 가기도 하였다. 납치당한 후, 다시 차량 뒤 트렁크에 숨어서 농성장에 진입하려던 범한화재 위원장이 탄 차량을 두고, 구사대와 금융노련 산하 노조간부들의 대치상황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런 사측의 악수에 금융노련의 반발도 심했고, 당시 시국도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군의 49제 등으로 국민들 반발심이 일고 있어, 치안문제를 우려한 정부가 해당 문제를 서둘러 종결하려고 했다. 그 결과 연대농성 투쟁은 성공했고 쟁의부장은 복직되었다. 이 투쟁을 계기로, 노조간부들의 안면도 넓어지고 교류도 활성화 되었으며, 연대를 통해 투쟁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도 생기게 되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이 전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를 묵살하고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겠다는 호헌선언을 발표하였고, 제도권 내 각종 단체는 앞 다투어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한국노총도 노동부의 요청을 받아, 김동인 위원장을 포함한 당시 16개 산별연맹 대표자 공동명의로 호헌조치를 찬성한다는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들의 뜻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노동조합 최상층부의 돌발행동이자 상층부 중심의 권력에 의존하는 노동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심한 일이었다. 당시는 노동악법 중에, 노동조합 업무조사권과 임원개선 명령권을 노동부가 가지고 있어서, 노동조합 상층간부가 노동부에 맥을 못 추는 시절이었다. 이에, 한일투자금융노조가 중심이 되어 금융기관 13개 노동조합이 “한국노총의 4·13호헌 지지성명은 노동자의 뜻이 아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사무직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호헌 반박성명서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은 대다수의 금융권이 여의도에 본사가 자리하고 있지만, 당시는 지리적으로 명동, 을지로, 광교, 남대문 지역에 금융권 사업장의 노동조합과 본사, 지점이 밀집해 있었다.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가 있는 바로 그 날, 서울 광화문 성공회에서, 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그날을 기점으로, 명동과 을지로 입구에서는 넥타이부대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대거 가담하였다. 아스팔트 위에서 학생들과 함께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고, 인도에 올라서서 학생들을 쫓는 경찰을 향해 “때리지마, 쏘지마”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달렸다. 5공 시절, 안정희구 세력이라고 지칭하던 중산층 넥타이 부대가 등을 돌리자, 여론에 밀린 군사독재정권은 6·29 항복 선언을 하였다.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인 6월 항쟁에서, 넥타이부대가 학생들과 함께하였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김의 분열로, 너무나 애석하게 민주정부 수립에 실패하였다.

 

 

격랑의 세월

 

 

1991년 다시 대한보증보험 노동조합 위원장에 선출되어, 위원장직을 3번째로 맡게 되었다. 1992년은 정부가 뜬금없이 일방적으로 총액임금제를 강제한 해였다. 이로 인해 또 일주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승진을 빌미로 조합원을 탈퇴시키던 사장이, 갑자기 업무를 중단하고 단식에 돌입하였기 때문에, 명분에 밀리지 않기 위해 시작한 단식이었다. 사장이 먼저 단식을 시작한 이 희한한 사건은, 온갖 신문에 단식하는 사진이 실리는 등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러한 결과로, 그해 총액임금 저지 투쟁에서는 대한보증노조만 살아남았다.

94년, 전국보험노련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회 노동위 돈봉투 사건의 동부화재가 우리 연맹 산하 조직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매달리면서, 거대한 재벌에 대한 분노가 생겼다. 당시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시민연대의 지원과 노동부의 중재로 그 문제가 해결되자, 바로 보험노련과 사무금융노련의 통합 작업에 착수했다.

 

 

사무노련 위원장 시절

 

 

1995년 2월, 보험노련과 사무금융노련이 통합하여 출범한 전국사무노동조합연맹은, 노동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신호탄으로 일대 사건이 되었다. 사무노련은 300여개 노동조합에 조합원이 7만 명이나 되는 거대조직이 되었다. 대의원대회, 창립기념식 격려사, 사업장 순방 등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지나가는 시절이었다. 95년 11월 11일, 연세대에서 출범한 한국 최초의 자주적인 노동조합 총연맹인 민주노총이 결성될 때에는 창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민주노총 결성의 최대조직은 사무노련과 금속노련이었다. 그 후, 96년에 중앙노동위원회 위원(민주노총추천 근로자위원)에 위촉되었다. 개별 노동자의 어려운 문제나 노사갈등을 공정하게 해결하는 중앙노동위원의 역할을 10년 동안이나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1997년 노동법개정 민주노총 총파업투쟁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나는 87년 6월 항쟁의 경험을 살려, 사무직 노동조합의 깃발을 든 넥타이부대를 이끌고 파업투쟁에 동참했다. 한국노총의 금융노련도 설득하여, 국제상업사무노련의 산하단체인 Fiet-klc 회원 조합 이름으로 함께 파업투쟁에 참여했다. 사무직 노동조합은 여론의 풍향계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6월 항쟁에서 넥타이부대의 등장으로 군부독재가 항복한 6·29선언이 나왔듯이, 김영삼 정권도 그렇게 물러서고 말았다. 국제적으로 우리나라는 house-union으로,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노동조합으로 인식되었다. 자주적이지만, 한없이 약해 보이던 민주노총의 정치파업이 전 세계의 지원과 찬탄을 받으며 성공한 것이다.

 

1997년 ‘6월 항쟁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사무노련에서는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다른 정당 후보는 오지 않고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만 참석하였다. 63빌딩에서 토론회가 끝난 뒤 가진 식사 자리에서 옆에 앉은 김 후보는 “김 위원장, 이번에는 정권교체를 할 수 있도록 조합신문에 홍보도 많이 하고 잘 도와주세요” 하면서 내 손을 꼭 잡고는 신신당부를 하였다. 민주노총의 권영길 위원장도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국민승리21을 결성하고 대선에 출마하기로 하였다. 우리 노조 간부들은 여러 가지 현실의 실천적 가능성과 시급성을 고려하여, 수평적 정권교체와 노동자후보 100만표 획득을 상정하였다. 그해 말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서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100여만표를 획득한 권영길 후보는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을 창당하였다.

 

1998년 IMF사태는 국제 독점금융자본들이 한국의 시장개방, 특히 금융시장의 개방을 목표로 일으킨 사건처럼 보였다. 제일 먼저 우리정부에 요구한 사안이 금융기관 인수합병을 위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도입이었다. 20%가 넘는 높은 이자율은 멀쩡한 회사까지 망하라고 발로 차는 격이었다. 5·16후 23년 동안 불망의 신화를 자랑하던 금융기관이, 34개나 문을 닫는 불상사기 일어났다. 보험, 증권, 카드, 리스, 종금, 투신, 연금, 협동조합 등이 소속된 우리연맹의 최대 시련기였다. 무너지는 회사, 직장을 잃고 떠나가는 조합원을 보며, 도산 직전인 기업의 신인도를 높이는 정책건의와 조합원 위로행사 등, 연맹위원장으로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 금융 산업의 구조적 병폐와 해결방안 및 노사문제의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다니던 보증보험도 신용을 공여해준 많은 회사들의 도산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달했다. 정부에서도 BIS비율 미달이라고 보고, 청산 선언을 준비 중이었다. 이에 사무금융노련연맹 위원장으로서, “IMF사태가 발생한 것은 국가의 외환부족이라는 신인도 하락 때문이다. 경제회복을 위해서는 1개의 회사에 100억을 빌려주는 것보다, 보증보험에 100억을 투자하여 신인도를 높이고 1만개 회사에 신용을 공여하여 기업 활동을 왕성하게 도와주는 것이, 자금사용의 효율성도 기하는 국난극복의 첩경이 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정책제안을 했다. 다행이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보증보험에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다. 결국 보증보험은 국난극복의 금융질서 재편과정에서 적절한 도구로 잘 활용되었다.

 

IMF시절 너무나 아쉬웠던 한 가지는, IMF가 자금을 투입하기 전 정리해고 도입 등 관련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노사정 합의를 요구했던 것이다.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한 김대중 정부는 취임 전부터 외환위기 타개를 위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노사정 법령에 의하여 대표단도 꾸려졌다. 민주당 사옥을 점거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상견례 겸 회의에 참석해 내용을 파악하라고 노사정회의에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다. IMF를 통해 우리의 협상과 합의내용이 전 세계에 중계되므로, 노사정 합의 사항이 전 세계에 공인되는 것이다. 늦었지만 선진국 어느 나라의 사회적 협약체결 보다 확실한 체결방법으로 보였다. IMF가 제시한 합의 기한이 2주정도 남았는데도, 협상대표단은 바로 그날 밤에 합의를 하고 왔다. 선보라고 보냈더니 그날 밤에 애기안고 돌아온 꼴이었다. 며칠만 더 외환위기 극복의 방법을 논의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쳤더라면 민주적으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 텐데, 이는 정부대표단의공명심을 앞세운 단견에다 국가장래를 생각해 보지 않는 너무나 무책임한 처사였고 미래가 걱정되는 한탄스러운 결과였다.

 

IMF시절을 겪으면서 내 몸은 여기저기 탈이 났다. 그동안 국선도 수련의 공력으로 노조위원장으로서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한 일과를 소화할 수 있었지만, 과로와 분노는 내 몸을 상하게 하고 공력을 바닥나게 했다. 그렇게 수련을 해서 철인이나 된 것 같던 내 몸은, 노동조합위원장 생활 15년 만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99년 2월에는 사무노련 위원장도 내 놓고 다시 수련에 전념할 생각을 했다.

 

 

다시 광화문에서

 

 

2007년 서울보증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국선도 수련을 하면서 살던 중 16년 자동차노련 초대위원장을 지낸 배범식이 도장으로 찾아와 “ 노조간부 출신들이 은퇴한 후 어렵게들 지내고 있어요. 갈 때는 다가오고 자식들 보기 민망해서 수목장할 터라도 잡아야 할 텐데요”라고 고민을 토로하며, 민주노조동지회를 만들어 그 사업주체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민주노조동지회(80년대)가 결성되었다. 그는 세대별 노동조합인 노후희망유니온의 공동위원장도 겸하고 있었다. 당시 어버이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노인부대의 별로 좋지 못한 행동이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기사화 되곤 했다. 우리나라도 급격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노인들이 어른으로서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야, 이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특히 대규모로 은퇴하고 있는 베이비부머세대, 6월 항쟁 참여세대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고령화 사회의 방향이 달라지리라 보인다.

그해 겨울 어버이연합과는 또 다른 노인부대들이 노후희망유니온의 깃발아래 모여서 “노인들도 열 받는다, 박근혜 정권은 물러가라” 외치고 노래하며 행진하였다. 그리고 탄핵이 결정되었다.

 

 광화문 연가

목이 메이고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6월항쟁 30년이 지나 우리가 촛불을 들고 행진하며

부른  노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노래는 현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의 촛불행진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명예혁명으로

인류평화의 길로 가는 한민족의 손짓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정부가 선출되어 소통과 협치를 기반으로

이렇게 헝클어 놓았던 남북문제를 둘러싼 실타래를 잘 풀어간다면,

이 민족에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동북아평화는  물론 세계평화를 이루어가는 길잡이가 될 수 있겠지요.

그 추운 겨울날 노후희망유니온의 깃발아래 함께한

광화문 촛불행진은 우리 후배나 손주들에게 들려줄 자랑스런 얘깃거리가 되겠지요.

뒷풀이의 순대국 한 그릇과 막걸리 한잔의 추렴,

이제 열 받은 노인들이 뒷방 차지가 아니라 역사를 바꾸자는 정담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촛불 명예혁명의 추억과 자랑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동안 언 손을 잡아 주어서 고마웠고 행복했읍니다.
이제 새봄이 와도 가끔은 또 모여야겠지요.
촛불의 완성을 위해 백발을 휘날리면서!

 

탄핵이 인용되던 날 부른 노래다.

나는 ‘6월항쟁 30년 사업추진위’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때라 감회가 남달랐다.

 

나는 지금 국선도 수련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

 

그 때 젊어

세상일이 궁금해

다 가보지 못한 길

이제는 다 가 보아야지,

언제 다시 태어나 가 볼 수 있을거나

이번 생이 아니면

그 길을

 

나는 지금 세대별 노동조합인 노년층 노동조합 노후희망유니온의 위원장을 맡아서 또 다른 길을 찾아가고 있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