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멘터 #12515 댓글 달기 / Blog / 글쓴이 김국진 1980년 기자해직이 가른 인생항로 1980년 기자 해직이 가른 인생행로 이원섭(전 한겨레 논설위원실장. 전 가천대 교수) (얼굴사진과 맞물린 대표적 경력)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 69학번 조선일보 기자. 1980년 광주항쟁 관련 해직 한겨레신문 창간대변인·정치부장·논설위원실장 가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내일신문 논설고문·칼럼니스트(현) 누구나 인생의 분기점이 있기 마련이다. 나의 일생을 가른 결정적인 분기점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벌어지던 때였다. 당시 나는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였다. 1975년 가을 신문사에 입사해 5년차였다. 기자생활의 기초수련 과정이며 가장 고되다는 사회부 경찰기자를 거쳐 선망하던 정치부로 옮겨 야당 출입기자(상도동 YS · 동교동 DJ 담당)로 취재의 보람과 함께 내가 쓴 기사의 영향력도 제법 느낄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12·12 하극상에 이어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는 정계 지도자였던 김대중을 내란음모 혐의로, 김종필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하고, 김영삼은 자택에 연금시켰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해 광주민중항쟁을 유발했다. 숱한 생명이 희생됐으나 계엄당국의 검열로 언론은 진실을 한 줄도 보도할 수 없었다. 계엄사에서 발표하는 거짓 정보만 언론에 게재됐다. 국민의 분노가 분출하는 가운데 언론계는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신군부의 쿠데타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계엄사의 검열을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제작거부로 맞서기로 했다. 이미 몇몇 언론사가 제작거부를 결의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광주 민중항쟁 시기 조선일보 검열·제작거부에 앞장 조선일보의 경우 누군가 나서서 시국에 대해 토론하고 검열·제작거부에 들어갈지 여부를 논의해야 할 터인데 앞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총칼을 앞세운 군부의 서슬 퍼런 분위기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여겨졌다. 신문사에서 쫓겨나 가시밭길 인생을 걸어야 할 것이 뻔했다. 어떻게 들어온 신문사이고 어떻게 간 정치부인데, 너무 아깝고 아쉬웠다. 기왕 회고록이니 좀 더 솔직해지자. 71년 위수령 때 학사 제적도 당했으니 나름의 ‘정의감’은 입증된 터이고, 추후 비겁했다 힐난을 받더라도 ‘정상참작’이 되지 않을까? 나중에 언론계에서 명성을 얻고 더 커서 ‘의미 있고 정의로운’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려운 집안 형편은 어찌할 것인가? 자기를 합리화하며 빠져나가기 위한 별별 핑계거리와 변명거리가 머리를 맴돌았다. 인간적 고민이었지만 부끄러운 얘기다. 온갖 유혹에 굳게 먹은 마음이 자꾸 흔들렸다. 언론의 일차적 사명이자 최고 직업윤리인 진실보도 책무와 현실타협 사이에서 숱한 고뇌와 번민의 날을 지새웠다. 실존적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결론은 ‘너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냐’였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설사 이번에 눈 질끈 감고 넘어간다 해도 과연 앞으로 권력자 비위를 맞추고 신문사주 구미를 맞춰가면서 기자로서 버틸 수 있겠느냐?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자괴감을 견딜 수 있겠느냐? ‘본질적 물음’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1975년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벌이다 기자 33명이 무더기로 해직된 후여서 분위기가 잔뜩 위축돼 있었다. 앞에서 이끌어줄 선배가 없었다. 부득이 75년 이후 입사한 동기와 후배기자 20여명이 비밀리에 만나 시국상황과 언론계 움직임을 분석하고 이튿날 오후 편집국 기자총회를 열어 제작거부 여부를 토론하기로 결의했다. 후배기자 모임을 제안했던 내가 떠밀려 기자총회 사회를 보게 됐다. 며칠 전부터 은밀하게 몇몇 선배·동료들을 만나 슬며시 운을 떼 봤으나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칼바람 부는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외로움이 몰려왔다. 분위기가 극도로 미묘했다. 유난히 선후배 서열을 따지는 신문사에서 ‘새까만 후배 놈’들이 기습적으로 기자총회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고, 시국상황에 대해 토론하자며 편집국 한복판 맨바닥에 우르르 몰려 앉은 ‘희한한 광경’이었다. 그 주위를 편집국장, 부국장단, 정치·경제·사회·문화부 등 각부 부장들이 에워싸듯 도열했다. ‘니들이 뭔데 멋대로 기자총회를 소집하느냐’고 호통을 치는 난감한 상황이 연출됐다. 선배기자들 150 여명은 엉거주춤 제자리에 앉아 어찌되어가나 응시하고 있었다. 위압적인 분위기에 짓눌려 토론에 나서기로 했던 동료들이 머뭇거리며 선뜻 나오지 않았다. 지명을 받고 나와서도 어물어물 몇 마디하고 들어가는 통에 영 분위기가 뜨지 않아 사회자로서 진땀을 흘리던 기억이 난다. 결국 후배 몇몇이 용감하게 나서 검열거부·제작거부를 해야 할 이유를 열정적으로 설파해 선배들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고, 회사 간부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총회를 마쳤다. 이튿날 다시 기자총회를 열고는 미리 준비한 검열·제작거부 선언문을 낭독하고 제작거부에 돌입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일선 기자들은 기사를 출고하지 않았으나 간부진들이 총동원돼 그럭저럭 지면을 메꿔 신문은 그대로 발행됐다. 사전에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하고 치열한 토론도 벌이지 못한 채 뒤늦게 제작거부 선포에 들어가 민망함도 있으나, 역부족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나중에 해직될 게 뻔했고, 누군가 나서줬으면, 선배가 이끌어줬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했으나 그럴만한 선배들은 이미 5년 전에 무더기로 쫓겨난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을 되뇌는 것은 1980년 국민이 염원하던 민주주의가 군홧발에 짓밟혀 광주항쟁이 일어날 당시에 언론인으로서 진실을 보도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고 개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역사에 기록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전국에서 많은 양심적 기자들이 언론인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힘든 용기를 냈고, 1000여 명이 해직의 아픔을 겪었다는 점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당시 ‘외로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했더라면 자괴감과 열패감으로 과연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싶다. 자칫 조선일보 지면에 ‘치욕적인 오명’을 남기게 되지는 않았을까 싶어 모골이 송연해지기도 한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었고 적잖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때의 ‘칼날 같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 후 나의 인생길은 마치 이미 정해진 운명의 행로를 따라가는 것과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980년 5월의 결심’을 뛰어넘을 만큼 중대하고 고민스런 순간은 없었다. 그때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나름 노력했고, 곁길에는 아예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예상했던 대로 1980년 7월 말, 신군부가 지목한 해직대상자 목록 앞머리에 올라 신문사에서 쫓겨났고 고달픈 해직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생계를 위해 대우그룹, 전자신문 등에 근무하며 울분을 달랬다. 그런 나에게 한겨레신문 창간은 운명처럼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뒤에 상술하겠지만 창간멤버로 참여해 모두 18년을 근무했다. 정치부장, 여론매체부장, 체육부장, 특집부장, 논설위원, 논설위원실장, 통일문화연구소장(겸직) 등 빛나고 과분한 직책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언론사 경력을 발판으로 가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현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임용돼 65세 정년퇴임할 때까지 10년을 근무했다. 그 후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 내일신문의 논설고문으로, 최근에는 칼럼니스트로 시론과 칼럼을 쓰고 있다. 고맙고 과분한 일이다. ‘재입영통지서’ 받고 동아·조선·한국일보사 돌며 부당성 고발 내 인생은 아무래도 언론계 활동에 무게추가 실려 있다. 신문기자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1971년 위수령 발동으로 인한 학사제적과 연관이 깊다. 71년 당시의 전체 상황은 문집에서 총괄할 것이므로 생략하고 개인경험 중심으로 서술할까 한다. 재수 끝에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들어갔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으로 국가에 기여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학년 교양과정부 생활을 거치며 특히 ‘후진국사회연구회’란 사회과학서클에 들어가 이런저런 모임을 가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됐다. 3학년 때인 71년 문리대 학생회 간부 활동을 하면서 교련강화(학원병영화) 반대 시위와 3선 개헌 무효투쟁에 앞장서게 되고, 10·15위수령 선포로 학교에서 제적당해 군대에 끌려갔다. 71동지회원들이 두루 겪었듯이 최전방부대에 배치돼 보안사의 사찰을 받으며 힘든 졸병생활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일등병 때 유신헌법 찬반투표가 반공개리에 진행되는 것에 항의해 투표를 거부하다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육사 11기로 위관(尉官)시절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에 학사 편입했던 연대장(안교덕 대령)이 나름 감싸줘 다행히 큰 탈 없이 넘어갔다. 곧바로 군종병(軍宗兵)으로 발령을 내 부대 안에서의 괴롭힘을 면할 수 있었다. 후일담이지만, 한겨레신문 정치부장을 할 때 노태우 대통령의 육사동기이자 친한 친구로 임기 말에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온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덕분에 무사히 제대할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하며 당시 일을 물으니 ‘문제 사병’인 나를 그 부대에 그대로 두면 온갖 괴롭힘을 당하다 탈영을 하든 총기사고를 치든 아무래도 큰 사고가 터질 것 같아서, 군목(軍牧) 밑에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아 그리했다는 말을 들었다. 현명한 지휘관으로, ‘선배 덕’을 본 셈이다. 사연 많은 군 시절 얘기는 지면 사정으로 생략한다. 기회가 되면 상술할 예정이다. 제대를 하고 3학년 2학기에 복학한 어느 날이었다. 집으로 난데없이 군대 ‘재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3학년 때는 교련을 거부해 수업을 듣지 않았지만, 1~2학년 때 교련과목을 이수했으므로 병역법에 따라 2개월 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받아 만기 전역했었다. 그런데 국방부가 돌연 ‘교련을 반대한 대학생들한테도 단축혜택을 준 것은 잘못된 조치였으니 재입영해 2개월을 마저 채우라’고 통지한 것이다. 불응 시에는 군 기피자로 처벌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곁들여 있었다. 너무도 황당하고 억울했다. 병역법을 무시하고 ‘괘씸죄’를 적용하며 ‘뒤끝’을 보인 국방부의 치졸한 행태였다. 알아보니 나보다 먼저 제대한 동지 몇몇은 이미 재입영한 상태였다.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불법성’을 고발하기로 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세 신문사를 71동지회 멤버로 같은 처지였던 김경두(서울문리대 정치학과 4년), 김승호(서울상대 경영학과 4년)군과 함께 차례로 순방했다. 다음날인 10월 31일자 조간 한국일보 사회면에 5단기사로, 같은 날 석간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더 크게 중간머리기사로 그야말로 대서특필됐다. 이튿날엔 전국 모든 신문에 보도됐다. 누가 보더라도 말이 안 되는데다 일사부재리 원칙에도 어긋나는 횡포요 치졸한 보복촌극이었다.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화를 내며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군 내부알력이 작용했는지 모르지만) 강창성 직전 보안사령관이 ‘서종철 국방장관이 잘못 판단한 것 같다’는 취지로 보고했다는 뒷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결국 다음날 ‘재입영 조치’는 백지화됐다. 유신치하 엄혹한 상황이었지만 언론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들어가 본 신문사의 강렬한 기억도 기자직 지원의 ‘동기부여’가 됐다. 특히 동아일보를 찾아갔을 때 편집국은 이상하리만큼 후끈한 열기에 가득 차 있었다. 건물 기둥 곳곳에 커다란 붓글씨로 ‘자유언론실천 만세!’ ‘기관원과 개는 출입금지’라 쓰인 글이 나붙어있었다. 많은 기자들이 흥분된 어조로 언론자유! 운운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참 운이 좋았다. 바로 며칠 전인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모임을 갖고 진실보도를 다짐한 직후였다. 평소 같으면 유신체제에서 군대를 조롱거리로 만든 내 사연을 그리 크게 보도할 수 없었을 터인데 당시 분위기와 맞물려 대서특필된 것이다. 언론자유를 외쳤던 그들 기자·PD·아나운서들은 이듬해인 1975년 ‘동아 백지광고사태’를 겪으며 대거(113명) 해직돼 ‘동아투위’를 결성한 이래 4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거리에서 사과와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도 같은 해 33명이 해직돼 ‘조선투위’로 활동 중이다. 나는 언론인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기자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합격자 명단보고 난리친 정보부, ‘합격 취소하라’ 압력 조선일보 기자생활 5년간 겪은 비화 두 토막. 첫째는 천신만고 끝에 ‘기적같이’ 입사한 사연이다. 기자들의 언론자유 투쟁과 노조설립 움직임에 화들짝 놀란 신문사 사주들은 그해 오랜 전통이던 공채방식을 바꿔 대학의 추천을 받은 지원자 중에서 선발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75년 당시 중앙일보·동아일보 등이 먼저 이 방식을 채택했다. 공채를 유지한 신문사 가운데 첫 번째로 시험을 치른 곳이 조선일보였다. 통상 기자 선발과정은 객관식으로 1차 시험을 치러 상당수를 탈락시키고, 2차로 논문·작문 등 글쓰기능력을 검증하며, 3배수 정도로 추린 인원을 대상으로 사장과 간부진이 면접을 실시해 최종합격자를 확정하는 절차를 거친다. 1,2차 합격자는 수험번호만 공지하고, 3차 면접을 거친 최종합격자는 이름을 사고(社告)로 공지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유신체제에서 언론계 진입장벽은 매우 까다로워 학사징계를 받은 운동권학생은 여간해선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최종합격자를 발표하기 전에 중앙정보부나 경찰 등 치안담당 부서의 ‘신원조회’를 거치는 것이 관행이었다. 헌데 조선일보 인사담당자가 바뀌면서 신원조회 과정을 빼먹고 최종합격자가 발표됐다고 한다. 나중에 회사 간부로부터 전해들은 뒷얘기다. 어렵게 들어왔으니 ‘알아서 더 열심히 하라’는 취지로 귀띔해 준 것 같다. 최종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자 여기저기서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10·15 위수령 때 제적됐던 ‘문제 대학생’을 어떻게 조선일보가 두 명씩이나 뽑을 수 있느냐는 거센 항의였다. 취재기자 8명 명단에 나와 ㅂ군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정보부는 두 명에 대한 합격을 취소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신문사로서는 여간 고민거리가 아니었을 것 같다. 명색이 ‘독립 언론사’로 사장까지 면접해서 최종합격자를 발표했는데 정보기관 압력으로 취소했다가는 언론계에 쫙 소문이 퍼져 낯을 들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이고 신문장사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어서 회사 고위간부가 정보부 측과 여러 차례 협상한 끝에 확실히 ‘교화(敎化)’시켜서 잘 활용하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하고 간신히 넘어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비화는 경찰기자 때 쓴 기사가 ‘말썽’이 돼 ‘남산’(정보부)에 끌려간 이야기다. 연세대 ㄴ교수가 중앙공무원교육원에 재교육 차 입교한 3급(현 직급 5급) 고위직 공무원들을 상대로 한 조사를 토대로 쓴 논문(‘한국 관료엘리트의 가치체계와 성분에 관한 조사연구’) 중에 상당수(40.8%) 공무원이 정부가 역점을 둬 추진하던 ‘서정쇄신’(庶政刷新·부정부패척결) 성과에 부정적이며,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내용을 크게 기사화한 것이다. 나로서는 뒷부분이 잘릴지도 몰라서 일단 길고 상세히 써 보냈는데, 웬일인지 기사전문이 사회면 박스기사로 돋보이게 실렸고, 기사를 본 박정희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냈다는 것이다. 논문을 쓴 ㄴ교수, 첫 보도를 한 CBS기자, 그리고 가장 크게 쓴 내가 남산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회사로부터 “아무래도 한번 다녀와야겠다.”라는 말을 듣고 소속기자를 보호해주지 못하는데 대한 서운함으로 피신해 버틸 생각도 잠시 했으나 기자를 계속하려면 그럴 순 없었다. 심사숙고 끝에 기왕에 가는 것, 회사에 폼도 잡고 생색도 잔뜩 내자며 “내가 회사를 대표해 다녀오겠다.”고 짐짓 ‘의연한 척’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박스기사로 돋보이게 편집한 것은 간부진 책임으로 일선기자인 내가 책임질 몫은 아니었으나 내가 ‘흔쾌히’ 모두 떠안고 간 덕에 회사 고민을 덜어준 셈이었다. ‘꽤 쓸 만한 놈’이란 좋은 평가가 나돌았다고 한다. 막상 정보부에 출두하니 분위기가 영 험악했다. “여기 온 적 있느냐”는 첫 질문에 “처음”이라고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켕겼다. 대학생 때 끌려와 고생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곧이곧대로 답하면 치도곤 당할 것이 뻔한 터라 거짓말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 없이 수작업을 하던 시대였기에 통했을 터이다. ‘남산’과의 첫 인연은 대학 3학년이던 1971년 1학기 초였다. 4월초 어느 날 학교 근처 다방에서 모임을 갖던 문리대 운동권 10 여명이 관할 동대문경찰서에 모조리 연행된 일이 있었다. 그해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후보가 맞붙는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었고, 학원병영화에 항의하는 교련반대 움직임이 꿈틀대던 시기라 정보부가 대학가 움직임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새로 출범한 학생회 간부 중 핵심분자 5명을 올려 보내라고 지시를 한 듯하다. 외곽에 머물던 학생운동권이 그해 대표성을 지닌 학생회까지 장악한데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양자를 분리시키는 공작으로 학생회 간부들을 선제적으로 혼쭐내 각개격파 하려던 전략이 아니었나 싶다. 이호웅 학생회장, 강우영 부회장, 부장을 맡았던 임종대, 이석규, 그리고 내가 대상에 올랐다. 검은 지프차에 실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야전침대 받침목을 마구 휘둘러 매타작으로 기를 죽이고 며칠 밤샘심문으로 초주검을 만들었다. 조선일보에서 5년을 근무하며 얻은 ‘소득’은 조사부 기자로 근무하던 아내와 연애해 해직된 후인 1981년 4월 결혼하고 사랑스런 2남1여 자식을 둔 것이다. 한겨레신문 창간에 대변인으로 한몫 거든 것 자부심 내가 가장 오래 일한 한겨레신문과의 인연 역시 기자해직과 연관돼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후보를 앞세워 ‘6·29선언’을 발표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그리고 김영삼-김대중 두 야당지도자의 분열에 힘입은 노태우 대통령 당선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거짓항복 선언’인 6·29선언 중에는 신문 발행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꾼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는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등 해직기자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국민 후원을 바탕으로 ‘국민주’ 형식으로 돈을 모아 ‘새 신문’을 창간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권력·자본·사주로부터의 독립을 통해, 민족·민주·민생을 지향하는 ‘참 언론’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꿈과 이상은 높은데 실천력이 부족한 상태여서 동아·조선투위 선배들을 젊은 80년 해직기자들이 실무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며 내가 등 떠밀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창간준비위원회 대변인 직책을 맡게 됐다. 과연 창간이 될지 안 될지 불투명한 상황이라 한사코 피하고 싶었으나 주위의 간곡한 요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중책’을 떠맡았다. 내외신 기자들, 전국 각 대학신문, 각종 민주단체 기관지, 종교계 주보 등을 대상으로 ‘새 신문’이 왜 필요한지, 지향하는 방향은 무엇인지, 추진 주체는 누구인지, 구체적인 창간계획은 어떠한지, 그리고 후원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을 널리 알려야했기에 정신없이 바빴다. 초반 지지부진하던 모금은 양 김씨 분열로 대선에 패배한 뒤 국민 상당수가 허탈감·열패감에 빠진 가운데서 오히려 힘을 받기 시작했다. 새 신문의 제호는 ‘한겨레신문’으로 정해졌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을 지향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 허탈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모아주십시오”라는 감동적인 신문광고 문구가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고 많은 국민이 모금에 적극 참여하면서 목표액 50억 원을 달성해 드디어 1988년 5월15일 창간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인 한겨레 창간에 한몫 거들었다는 자부심이 일생의 보람으로 남아 있다. 창간 초창기의 한겨레신문은 마치 중국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梁山泊)’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언론자유를 꿈꾸던 해직기자들, 박봉을 각오하며 다니던 언론사를 박차고 합류한 경력기자들, 민주화운동으로 옥살이하느라 언론사 근처에도 못 간 민주투사들, 새로 뽑은 수습기자들이 뒤엉켜 혼돈을 면할 수 없었다. ‘저마다 호걸풍’으로 목소리가 크고 개성들이 강한지라 기강이 잡히고 지도부의 권위가 인정받기까지에는 일정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순수한 열정으로 뭉친 집단이기에 온갖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기득권세력의 노골적인 견제와 방해, 그리고 ‘노동자 평균임금 수준의 박봉’을 묵묵히 견뎌나갔다. 성역 없는 보도와 참신한 시각, 그리고 기자정신을 좀먹는 일체의 ‘촌지’를 거부하는 운동 등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나는 조선일보 근무 경험 때문에 정치부에 배치됐다. 창간 이듬해인 1989년 3월 그때까지 미수교국으로 ‘금단의 지역’ ‘죽의 장막’이던 중국(당시로선 中共)에 대학교수로 신분을 위장해 보름간 취재를 다녀온 것이 기억에 남는다. ‘가짜 교수’ 명함 찍고 수교 전의 중국모습 취재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을 거친 뒤 덩샤오핑(등소평)의 개혁·개방 바람이 휘몰아치며 대변혁의 와중에 있었다. 외국의 투자유치를 원하던 중국은 수교 전이라 극소수 한국 기업인과 경제학자들에게만 방문기회를 주었다. 김대중 정부 첫 농림부장관을 지낸 농경제학자이자 중국전문가인 김성훈 중앙대 교수와의 각별한 인연(동서지간)으로 그가 이끄는 ‘동북아경제연구교수단’의 일원으로 위장해 선양, 하얼빈과 수도 베이징을 둘러보았다. 모 대학 전자공학과 조교수란 가짜 명함을 찍고, 학교 연락처에는 집 주소와 내 전화번호를 적어 넣었다. 수교 전이라 항공편이 없어 서울서 남쪽 끝 홍콩으로 날아가 정보요원 접선하듯 중국 관리를 만나 비자를 대신할 ‘허름한 종이쪽지’를 받아서 동북3성인 요령성 선양(심양)으로 향했고, 곳곳에서 변화하는 중국 모습을 직접 취재할 수 있었다. 당시 느낀 것을 ‘현장에서 본 중국의 새 선택’이란 제목으로 9회 시리즈로 연재해 숱한 화제를 낳았다. 한국 언론으로서는 최초의 본격 중국기행문이었다.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조선족 항일빨치산 여전사 이민(李敏) 여사를 우연히 만나 국내에 소개했다. 이민 여사는 흑룡강성 성장을 여러 차례 지낸 유력한 중국 항일투사 진뢰(陳雷·천레이)와 결혼한 여걸이다. 삼강평원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쫓겨 옛 소련 땅 하바로프스크 근처 비밀기지로 밀려갔다. ‘88국제여단’으로 알려진 항일연합군 기지에서 그는 김일성·김정숙 부부와 3년 남짓 함께 생활했다. 유아시절의 김정일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소련의 물적 지원을 받으며 만주지역 중국과 조선의 투쟁가들이 집결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는 훗날 북한 지도부로 등장하는 김일성 외에 김책, 최용건, 최현, 강건, 안길 등이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진뢰·이민 부부는 김일성 주석이 생존했을 때 여러 번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했으며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도 직접 평양에 가 조문했다고 한다. 확인하려고 ‘로동신문’을 찾아봤더니 상주인 김정일과 진뢰·이민 부부 셋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 1면에 큼직하게 실려 있었다. 체제대결 필요성 때문에 정부가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을 깎아내려 진실이 헷갈리던 시기에 이민 여사의 증언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칫 국가보안법에 걸려 곤욕을 치를 우려 때문에 ‘중국항일열사록’에 기록돼 있는 이민 여사의 항일투쟁 부분만 소개하고 김일성그룹과의 소련생활은 당시엔 신문에 쓸 수 없었다. 10년 후인 1999년 이민 여사가 서울에서 개최된 NGO세계대회에 중국 하얼빈대표단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그를 다시 만나 보충취재를 해서 월간 신동아(2000년 3월호)에 ‘이민여사와 김일성 항일빨치산부대’의 상세한 이야기를 소개했고, 나중에 내 칼럼모음 책자 ‘차라리 소가 되고 싶다’에도 전재했다. 정치부장 때 남북 총리회담 취재 차 평양 방문 취재차 평양을 방문한 기억도 새롭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 남북 사이에 고위급회담이 열리고 양쪽 총리가 평양과 서울을 번갈아 방문하면서 대화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한겨레 정치부장으로 1992년 9월15일부터 3박4일간 평양에서 열린 정원식-연형묵(북한) 총리의 8차 고위급회담 취재 차 평양을 방문한 나는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북한사회를 겉모습이나마 직접 접하며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영빈관인 ‘백화원초대소’에 묵으며 인민문화궁전, 목란관, 옥류관 등 곳곳을 방문하면서 양쪽 체제의 이질성과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한반도평화 문제에 깊이 천착하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판문점에서 처음 만난 후 3박4일간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전담안내원 ‘박 선생’이 생각난다. 말이 안내원이지 ‘감시원’ 역할이 컸다. 처음에는 직업의식이 앞선 데다 그가 여기저기 따라붙는 것이 밉살스러워 몸을 숨겨 따돌리는 등 골탕을 먹이기도 했지만 며칠 붙어 지내다보니 이런저런 정이 들었다. ‘박 선생’은 처음 나에 대해 큰 오해를 했다. 젊거나 늙거나 다른 기자들이 모두 나에게 ‘지시’를 받고 써온 기사를 제출하는 것을 보고 한겨레신문 정치부장 ‘리원섭’이 아닌 숨은 실력자 ‘기관원’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평양취재는 관례적으로 ‘풀 시스템’(Pool System·공동기자단)으로 운영돼 왔다. 쓸거리는 많은데 취재인원이 한정된 탓에 기자단이 공동 취재해 공동 송고하는 제도다. 나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모임에서 회담장 모습이나 북한의 이런저런 풍경, 이모저모 소식을 총괄하는 이른바 ‘스케치팀장’을 맡게 됐다. 고사할 틈도 없이 현직 정치부장이어서 박수로 떠맡겨진 임무였다. 각자가 한두 꼭지씩 맡아서 취재하도록 현장에서 일거리를 고루 배분한 다음 취재해온 내용이 겹치거나 뒤엉키지 않도록 ‘교통정리’해 남쪽에 팩스로 보내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이 모습이 북한 사람들 눈에는 내가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까지 ‘지시하고 검열하는’ 것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풀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 줬으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다들 내 ‘정체’를 캐내려고 나섰는데, 모든 남쪽 사람들 설명이 일치해 겨우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면사정상 다 소개할 수 없지만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꽤 많다. 2년 반의 바쁘고 고된 정치부장 직을 끝내고 기자 해외연수프로그램에 지원해 선발됐다. ‘김일성평전’을 써 유명한 하와이대학 서대숙 교수에게 연락해 1년간 ‘방문연구원’ 생활을 했다. 가족들 왕복 비행기 삯과 체재경비까지 대주는 호조건이어서 박봉에 시달려온 가족들에게 남편과 아빠로서 면을 세울 수 있었다. 나도 모처럼 소진된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었던 소중하고 달콤한 기회였다. 하와이대학 방문연구원(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그곳 도서관에서 북한관련 서적과 자료들을 폭넓게 열람할 수 있었다. 어느 날(1994년 7월 8일) TV에서 김일성 북한주석이 사망했다는 긴급뉴스가 떴다. 국내에선 북한이 곧 붕괴하는 양 냉전적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그쪽 사정을 잘 아는 서대숙 교수와 지면 한 면을 통째로 터는 대형 인터뷰를 해 북한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대담기사를 보낸 기억이 난다. 귀국 후 논설위원을 자원해 정치·통일외교안보 담당 논설위원으로 사설과 칼럼을 집필했다. 그 후 논설위원 실장을 맡았고 통일문화연구소장도 겸직했다. 가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현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옮길 때까지 한겨레에서 총 18년을 근무했다. 가천대 신방과 교수로 10년간 재직 논설위원 실장 근무 당시 서강대학교에서 대학원과정 등록금을 전액 지원해주는 조건의 공모프로그램에 선발돼 언론대학원 석사학위를 받고, 그 인연으로 서강대 대우교수로 몇 년 강의한 것이 가천대학교 신방과 교수로 전직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나를 아끼고 좋아하는 주위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추천과 배려, 성원이 없었다면 55세에 정식교수로 임용되는 ‘파격’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살아오면서 많은 분들에게 신세를 졌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귀인’들이 나타나 도움을 줬다. 감사할 뿐이다. 가천대 교수 생활 10년은 언론의 이상과 현실을 학생들에게 직접 가르치며 느끼는 보람 말고도 대학생처럼 마음이 젊어지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교수생활을 통해 세상을 긴 호흡으로 보는 습관도 익히게 됐다. 교수 시절 석간 내일신문에 칼럼을 쓴 인연이 이어져 2014년 정년퇴임한 후에도 지금까지 줄곧 칼럼을 쓰고 있다. 때로 피곤하지만 한반도평화 관련 글쓰기를 통해 작은 몫이나마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보람을 느낀다.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겐 농반진반(弄半眞半) ‘생계형 칼럼니스트’라고 말하곤 한다. 평생 이재(理財)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터라 가급적 자식들한테라도 의존하기는 싫어 ‘평생 업’인 글쓰기를 계속하는 면도 없지 않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창작의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속성일진대, 나처럼 게으른 속인(俗人)에겐 ‘적당한 청빈(淸貧)’이 분발을 촉구하는 동기부여 촉매제가 되는 셈이다. 사실 한겨레신문에 들어갈 당시에는 작은 아파트라도 지니고 있었는데 18년 근무를 마쳤을 때는 전세살이로 변해 있었다. 한겨레를 욕먹게 할 뜻을 전혀 없으나, 그 좋다는 직책을 다 거쳤음에도 생활은 늘 쪼들렸다. 노동자 평균 임금 수준의 박봉에, ‘촌지’를 철저히 배격한 것도 있지만, 부서 운영비를 책정하지 않는 등 현실을 도외시한 시스템 미비 탓이 컸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틀이 잡히기 전 한겨레 초창기 선배들은 거의 비슷한 ‘자발적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대학으로 직장을 옮긴 뒤 학교 근처 경기도 죽전에 다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투사형’보다는 ‘선비 형’인데 세상이 험난한 길로 내몰아 돌이켜보면 평범한 월급쟁이보다는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천성이 ‘투사형’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비유하자면 딸깍발이 ‘선비 형’에 가깝다. 남 앞에 나서기를 꺼리고 가능하면 뒷줄에 앉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런데도 결코 순탄치 않은 ‘험난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올곧지 못한 세상 탓이 크다. 험한 세상이 나를 그리 이끌어왔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시절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 아래 3년 동안 ‘무감독 시험’을 치르며 체득한 것이 알게 모르게 인격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얼결에 반 학예부장을 맡게 돼 ‘학급지’ 문집을 펴낸 경험이 평생 글쓰기와 연관된 삶을 살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운명론적 생각도 든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내 인생은, 어느 시인의 표현을 패러디하자면, “‘일흔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