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영 고문 자서전 [내가 결정하는 나의 인생]

내가 결정하는 나의 인생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

 

나는 1951년 9월 27일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에서 아버지 원경선과 어머니 지명희 사이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해방 이후 농사를 짓기 위해 부천의 아늑한 산기슭에 터를 잡았고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우리처럼 변화가 극심한 사회에서, 게다가 상전이 벽해가 된다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닌 수도권에서 태어난 곳, 태어난 집에서 평생을 산다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1971년도 초에 그린벨트 제도가 시행되었다. 우리집 뒷산 중턱에 ‘개발제한구역’이라고 새겨진 콘크리트 경계석들이 줄줄이 세워졌다.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은 그해 연말, 그 말뚝들이 뽑혀서 우리집 아래쪽 밭 가운데로 옮겨졌다. 동네 어른들은 우리 부친이 아들을 잘못 간수해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보복을 당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71년 가을 위수령이 발동되고 전국의 학생운동 지도부 100여 명이 대학에서 제적되고 강제 징집된 직후에 그린벨트 경계선이 우리집을 포함되게 조정된 탓에 그런 소문이 나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연유가 박정희의 보복이었든 졸속행정 탓이었든 간에 나는 그린벨트 제도의 혜택을 평생 누리고 있다. 집이야 부모님이 흙벽돌을 찍어서 지은 집이라서 낡고 비좁지만 널찍한 마당에서 친구를 불러 삼겹살 잔치를 하고, 텃밭과 나무를 가꾸고 사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수령 발동 소식은 야영을 갔다 돌아오다 신문을 보고 알게 되었다. 마침 집에 없었기 때문에 체포를 면할 수 있었는데 귀가길 청량리역에서 그 소식을 듣자마자 울분을 못 이겨 근처 이발소에서 머리를 박박 깎은 것이 화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삭발한 나를 수상하게 보는 듯이 느껴졌고 도피하는 동안 내내 불안감에 싸여 지내게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한 친구가 가발을 구해 주었다. 이발소에 갔더니 가발을 다듬어 쓰려면 미장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종각 옆에 있던 ‘까치’라는 미장원을 찾아갔다. 아주 크고 호화로운 곳이었다.

미용사들 중에는 남자가발을 다뤄본 사람이 없었다. 서로 미루다가 결국 주인 원장이 맡아 내 머리를 다듬어 주고 있는데 어떤 손님이 다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개똥엄마! 나 방송 녹화 가야 하는데 빨리 머리해줘요.”

그 말을 들은 ‘개똥엄마’ 대답이 걸작이었다.

“야 이년아! 내가 평생 처음 남자머리 해보는데 개소리야. 아무한테나 하고 가.”

남자가 미장원에 가는 일이 드문 시절이었다.

 

도피생활을 끝내고 11월 말 용산역에서 논산훈련소 행 기차를 탔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이호웅 선배가 동행이었다. 내가 서울대 교양과정부 학생회장으로 일해서 잘 알던 사이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잡혀 같이 입영하게 되었다. 이호웅 선배는 나의 대한민국 육군 직계 졸병이다. 선배 노릇 한답시고 나를 자기 앞에 줄 세워준 바람에 나보다 한 군번 밑이 된 것이다.

이등병 군모를 쓰고 철원 102 OP 지하벙커에 소총수로 배치되어 개구리복을 입고 후방 철수 부대 따라 철책선을 떠날 때 까지 삼년 간 군 생활은 외롭지 않았다. 이 철책선 어딘가에 함께 강제 징집된 선배, 친구들이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옆 사단에 배치돼 있던 최열 선배가 우리 중대 옆 초소까지 와서 만나지는 못하고 경비전화로 통화한 일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대학 진학과 함께 시작된 나의 20대는 제적과 복학, 그리고 구속의 연속이었다. 79년 10월, 그해 봄 결혼 한 우리 부부가 유영표 선배의 신혼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맞은 ‘박정희 사망’ 소식은 곧 다가올 나의 30대에 서광을 비춰줄 것 같았다.

그러나 유신잔당들이 체육관 선거를 앞장세워 유신체제 연장을 도모하고,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양민을 학살하고 집권하는 과정에서 나는 또다시 수배되고 기자였던 아내는 신문사에서 해직되는 처지가 되었다.

수배가 끝난 뒤, 먹고 살 궁리 끝에 나는 아버지가 재배하는 유기농산물을 판매하는 것이 일거리가 되리라 생각하여 ‘풀무원농장 유기농산물 직판장’을 열었다. 아버지는 환갑이 훨씬 지나서 공해의 심각성과 당신의 일인 농사에서의 농약과 화학비료의 문제를 깨닫고 무작정 유기농업에 뛰어 들지만 생산과 판매 모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업에 대한 경험과 준비 없이, 별 밑천도 없이 뛰어든 일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원래 불안정한 농산물의 수급은 유기농산물이라는 한정된 범주의 유통에서는 훨씬 더 어려움이 컸다. 새로운 활로가 필요했고 그 초점은 소비자들의 공통된 요구인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품’에 맞춰졌다. 그렇게 선택된 제품이 두부, 콩나물이었고 지금까지 사업의 핵심가치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도와주다가 동업까지 하게 된 친구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민주화운동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서중석 선배의 권유로, 긴급조치 9호로 함께 복역한 박원순 변호사가 중심이 된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역사비평> 발행 일을 하던 중에 87년 시민항쟁이 일어났다.

 

직선제 개헌이 쟁취되고 이루어질 줄 알았던 민주정부 수립의 꿈이 야권분열로 무산되면서 ‘새로운 정치를 새로운 세력이 추진하자’는 기치 하에 제정구, 유인태, 이근성, 고영하, 김부겸 등과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어 정치에 뛰어 들었다.

92년 제14대 국회에 등원한 이래 다섯 번의 국회의원과 그 중간에 두 번의 부천시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일곱 번 선출된 공직자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국회에서 몸싸움을 없애고 협치를 강화하기 위한 ‘국회선진화법’을 제정하는데 앞장서서 노력한 일과 부천시에 전국 최초로 ‘버스도착시간 안내시스템’(BIS)을 도입한 것이다. 부천시는 전 세계적으로도 이 분야 선두주자가 되었다.

제 20대 국회를 끝으로 정치를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내 뜻으로 시작한 일이니 내 뜻대로 마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나이 칠십에 새로운 제 2의 인생을 시작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장수시대에 접어들었다. 5년 뒤에는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사회(전인구의 20% 이상이 노인인 사회)에 진입한다. 나는 이 1000만 노인들과 함께 ‘내 삶의 주인’으로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스스로 결정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을 여생에 해보고 싶다. ‘웰다잉(Well-dying)운동’에 뛰어든 계기다.

 

 

웰다잉은 내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의 완성

 

1971년 늦가을 머리를 빡빡 깎고 용산역에서 논산행 기차를 탄 지가 어언 50년이 지나간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두보가 노래했지만 한 번쯤 70이 넘도록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볼만 하다.

 

예부터 인간의 삶에서 다섯 가지 복을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오복의 첫째는 장수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를 누리는 것이고 셋째는 건강한 것이다. 넷째는 남을 돕고 베풀어 덕을 쌓는 것이고 다섯 번째 고종명(考終命)은 죽음을 편안하고 깨끗이 맞이하자는 소망이다.

이 오복 중에 첫째, 셋째, 다섯째 염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깨끗하게 죽고 싶다.’는 희망이다. 요샛말로 ‘건강, 장수, 웰다잉(Well-dying)’이다.

이 중에 현대인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있는데 바로 ‘고종명’이다. 내가 정치를 그만두고 최열 선배와 함께 일하고 있는 웰다잉 운동이 우리가 외면해 온 죽음의 문제를 삶의 한가운데로 꺼내놓고 함께 생각해보고 결정하고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영국의 씽크탱크 이코노미스트연구소(EIU)가 2015년 80개국을 대상으로 ‘죽음의 질 지수(Quality of Death Index)’를 조사했다. 영국이 1위, 대만이 6위, 일본 14위, 한국은 18위였다. 현재 한국에서 사망자의 77%가 병원에서 팔에 링거를 꽂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강력한 불빛 아래 싸늘한 침대에서 죽고 있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음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빌리지 않아도,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는 톨스토이의 경구를 인용하지 않아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쳐오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애써 외면하며 살고 있다.

죽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잘 준비하는 게 지혜로운 인생의 마무리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유언장 쓰기, 장기 기증 서약과 같은 과정을 통해 내 삶을 정리하면 삶의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웰다잉은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의 내 삶을 한번 정리하고 새로운 자세로 인생을 살게 하는 중요한 중간 점검과 같다. 이는 곧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길이다. 2020년 노인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령층 10명 중 9명은 좋은 죽음은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죽음(90.6%)이었다. 그리고 신체적·정신적 고통 없는 죽음(90.5%), 스스로 정리하는 임종(89.0%)이라는 생각도 많았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준비하고 결정해야 한다. 진학할 때, 취업할 때, 결혼할 때, 인생의 모든 단계가 마찬가지이다. 준비를 잘하면 좀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평소 준비하지 않으면 허둥지둥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미리 차근차근 준비하면 당황하지 않고 준비한 방향으로 매끄럽게 진행해 나갈 수 있다.

죽음은 가장 확실한 우리의 미래다. 그런데도 죽음에 대한 준비를 기피하는 이유는 막연한 두려움이 아닐까? 전쟁이 무섭다고 해서 전쟁에 대한 대화를 회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속수무책이 된다. 두려운 것일수록 더욱 준비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이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 세미나에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김할머니에게 자기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없다는 문제점 알게 된 때였다. 근본적인 대책이 연명치료에 대한 결정권을 존중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듣고 나서 국회에서 “웰다잉 문화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결성했다. 꾸준한 입법 활동을 전개하여 19대 국회 말에 “호스피스 완화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백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있다. 말기 상태에서 인공호흡기를 낄지, 심폐소생술을 받을지 등을 내가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현황 >

기준일 2018.6월3일 2019.6월 2020.6월 2021.6월
등록자수(명) 26,417 256,025 647,974 965,174

출처 :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연명의료결정법 제정에 나서면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이 인생의 모든 단계마다 결정해야 할 일이 있듯이 삶의 마무리에도 내가 결정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었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격을 잃지 않고 삶을 마무리 한다는 것은 연명치료를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만이 아니다.

내 재산을 어떻게 정리할지, 장례를 어떻게 치를지, 화장을 할지, 장기기증을 할지, 유산기부를 할지, 말기상태에 대비해서 후견인을 정할지, 모두가 내가 결정해야 할 일들이다.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병원이, 가족이, 법이 결정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연명의료, 장례절차, 재산배분을 놓고 부모형제간에, 자식간에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유언장을 쓰는 사람이 미국은 56%에 달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0.5%도 되지 않는다. 미국은 다 쓰니까 나도 쓰는 것이고, 우리는 아무도 안 쓰니까 나도 안 쓰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내 삶의 주인으로서 건강, 재산, 사후 절차 등 삶의 마무리에 관한 일들을 내가 결정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웰다잉 운동이다.

 

우리 사회에서 웰다잉의 문제가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빠르게 부상되고 있는 것은 고령화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령화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흐름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의 고령화는 유례없이 빠른 추세를 보이고 있다. 국제적인 기준으로 고령사회는 전 인구의 14% 이상, 초고령사회는 20% 이상이 노인인 사회다. 우리나라는 2017년 고령사회에 입했는데 불과 9년만인 2026년에 전 인구의 20%인 천만노인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세계적으로 빠른 고령화사회로 꼽히는 일본이 24년 만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고령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면 그것을 파악하기가 힘들고 대처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현재 우리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웰다잉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부재한 상황이다. 저출산 문제는 실패한 대책이고, 웰다잉 문제는 무대책인 셈이다.

정부의 노인정책은 주로 생활안정, 일자리 제공, 의료비 지원 등 복지정책에 머물러 있고 노인들의 죽음 대비는 수의·묘지 마련, 상조회 가입 등 외형적인 면에 한정된 반면 삶의 마무리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입각한 준비들은 미약한 편이다.

 

노년 인구 천만 시대가 멀지 않았다. 스스로 죽음을 미리 준비하여 아름답고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관련된 법과 제도를 만들고, 웰다잉 문화를 조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노인 빈곤문제가 심각하다 보니 당장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웰다잉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재산이 많고 적음에 대한 문제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삶의 주인으로서 삶의 마무리도 삶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사회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채 닥쳐오는 미래에 떠밀려가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고민하고 준비하는 품격 있고 에너지 넘치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천만의 노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러다 죽는 거지!’ 체념하고 살아가는 사회와 내 삶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자기결정권을 실천하는 사회의 품격과 활력이 같을 수 없지 않는가?

뽈 발레리의 말처럼 ‘생각하면서 살아라.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구는 우리 삶이 아름다웠듯이 그 삶의 마무리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쓸모 있는 조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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