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그 시절
이광택
(사단법인 한국ILO협회 회장)
학생운동, 전태일, 강제입영
경술국치 60주년이 되는 1970년 11월 13일 오후 청계천 6가에 있는 평화시장에서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자살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전태일의 시신을 인수하여 서울법대 학생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하였다. 장기표 선배 등과 함께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 성모병원 영안실로 들어가 이소선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태일이 대학생 친구를 그렇게 찾았는데도 이제야 와서 미안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나는 어머니의 청을 받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일 것이오,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요 12:24) 구절을 시작으로 10여 분간 ‘말씀’을 하였다.
1971년 4월 나는 부산대 학생 김재규(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정영시 등과 함께 부산대 시위를 계획하였다. 부산대 학생 5백여 명은 4월 15일 교련강화 반대와 언론의 무기력을 규탄하며 교문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 시위는 내가 편집장으로 있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회보」에 생생하게 보도되었다. 4월 19일 재야 민주화운동의 상설조직으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결성되어 청년조직들과 연대하여 박정희/김대중의 4·27 대선을 공명하게 치르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국민협의회와 학생조직 사이의 연락은 故 계훈제 사무국장, 김지하 시인 등이 故 조영래, 이신범, 이광택 등을 통해 하였다.
여름방학이 되자 서울법대 교수회의는 지하신문 「자유의 종」 발행인 이신범의 제명처분은 “법적 근거가 없는 부당한 처벌”이라며 학기말 시험을 거부한 나를 포함한 학생 18명을 7월 16일자로 징계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중징계인 1년 정학을 받은 5명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무렵부터 나는 지명 수배되어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2학기가 되면서 나는 이신범과 함께 황학동 중앙시장 뒷골목 하숙에 은신하였다. 10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학원질서확립 특명 9개항을 발표하고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나와 이신범은 각자 갈 길을 찾기로 하였는데 이신범은 10월 28일 체포된다. 얼마 후 나도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 그곳에서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의 혐의자로 장기간 조사를 받았다. 벌거벗긴 채 두 사람이 밤낮으로 야전침대 각목으로 두들겨 팼다. 관련자 중 이신범, 故 조영래, 심재권(전 국회의원), 장기표는 12월 1일 구속 기소되었고,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유기천 교수, 서울 상대생 김근태, 사상계 전 편집장 김승균은 기소 중지되었으며, 나는 자퇴서를 쓰고 눈이 하얗게 내린 12월 초 중앙정보부 부산분실 요원들이 호송하여 강제로 39사단에 입영하였다.
민중운동, 교원임용 거부, 출국 금지
1974년 7월 군복무를 마치고 2학기에 재입학하여 한 학기를 마저 마쳤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노동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려 했는데,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는 취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The Korea Times에 지원하여 선발된 다섯 명에 포함되었다. 1976년 8월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중간집단교육 노조간부 지도력 개발과정>이라는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간사로 발탁되었다. 이 무렵에 동일방직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나도 현장에 있었다. 1976년 7월 23일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들로 구성된 이영숙 집행부를 없애고 어용노조를 만들려고 획책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을 경찰이 강제 해산하자, 이들은 웃통을 벗고 ‘나체시위’로 저항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법대 조교를 지원하였다. 국립대학의 조교는 교육공무원으로 그 처우가 사립대학 조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공과 어학시험을 보아 합격하였는데 인사발령이 나지 않는다. 서울지검의 현경대 검사를 만나니 무언가 꺼내서 한 대목을 읽어 준다. “○월 ○일 ○시 ○ 강의실에서 ○○성명서를 낭독하고 창을 뛰어넘어 도주…” 현 검사는 이런 기록이 많아 교육공무원에 임용되기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 무렵에는 광화문에 있는 백범사상연구소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AI) 한국사무소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백기완 선생이 소장으로 있는 백범사상연구소에는 고은 시인, 임헌영 문인 등이 자주 출입을 하였고 후배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궂은 일을 맡았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1978년 9월 첫 딸을 출산하였다고 하자 고은 시인이 막걸리 턱을 내면 작명을 해주겠다고 제안하여 응락을 하였는데, 며칠 후 붓글씨로 쓴 “화옥(華玉)”이란 이름이 들어 있는 봉투를 가져왔다. 이 봉투를 들고 아내한테 고하니 퇴짜를 맞을 수 밖에…
박사과정을 끝내며 걱정이 생겼다. 국내에서 교원으로 임용이 안 된다니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침 1979년 초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는 나에게 독일 에큐메니칼장학처(Ökumenisches Studienwerk e. V.=ÖSW)에서 시행하는 장학프로그램에 지원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3월 초 한명숙(전 국무총리), 신인령 등 크리스챤 이카데미의 간사 6명이 구속되었다. 유신체제 시기 농민, 노동, 여성 등 각 부문 운동이 활성화되자 이들을 배후로 본 것이다. 나는 노심초사 사건의 추이를 살폈으나 소환되지 않았다.
8월에는 이 발생한다. YH 무역의 장용호 사장이 폐업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자 노동조합은 4월 13일부터 회사 정상화를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 면목동에 있는 이 회사의 농성장에 나도 방문하여 최순영 노조지부장을 비롯한 노동자들을 교육했다. 8월 9일 농성장소를 마포에 있는 신민당 당사로 옮겼다. 11일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1명(김경숙)이 추락사하였는데 이 사건은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부마민중항쟁, 10·26 사태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 종말의 도화선이 되었다.
ÖSW에서는 7월 10일 자로 초청장과 함께 항공스케줄을 보내왔다. 초청장에는 1979년 10월부터 3년 반 동안 처와 두 아이와 함께 유학으로 초청하며, 월 DM 1,310(당시 환율을 DM 1=250원으로 보면 327,500원)+왕복항공비를 지급한다고 쓰여 있었다. 내가 보낸 “독일의 (노사)공동결정(Mitbestimmung) 모델의 연구와 한국으로의 도입 가능성 검토”를 주제로 한 박사학위 연구계획을 브레멘대학교(Universität Bremen)의 故 마이어(Jürgen A. E. Meyer) 교수의 지도를 받도록 되었다.
그런데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 궁금하던 차에 중앙정보부 요원 두 명이 찾아왔다. 신원에 이상이 있어 여권을 발급할 수가 없다고 했다. 도대체 법적 근거가 무엇인가고 따졌다. 옥신각신하다가 나는 “기자회견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그들은 조건을 제시했다. 서기관급 이상 보증인을 4명을 세우라고. 나는 “왜 보증인을 내가 세우느냐?”고 항의했다. 얼마 후 그들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보증인 두 사람은 자기들이 세울 터이니 다른 두 사람은 나더러 세우라고.
인간다운 사회, 해외 민주화운동, 브레멘대학에서의 수학
1979년 10월 5일 난생처음 루프트한자(Lufthansa)를 타고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뒤셀도르프(Düsseldorf)를 거쳐 보훔(Bochum)에 있는 ÖSW 장학처 캠퍼스에 도착했다. 캠퍼스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독신자용 고층기숙사, 가족 있는 장학생들을 위한 소형 연립주택, 직원숙소, 유치원(Kindergarten), 탁아소(Kinderkrippe) 등 각종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하게 되다니! 이것이 “인간다운 생활이구나. 조국에서는 사람대접을 제대로 못 받았는데…10월 15일 ÖSW의 <예비대학>(Studienkolleg)의 집중어학과정에 들어갔다.
도착한지 20일이나 지났을까? 우리보다 먼저 Fellowship으로 유학을 와 이웃에 살고 있던 황민영 선생(전 농어업특위 위원장)이 밤중에 노크를 하더니 ”박정희가 죽었어!“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대학생활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독재자! 운명처럼 민주화 투쟁과 노동운동에 몰입했던 나를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몰아 고문 끝에 대학에서 몰아내고 이후 공직 취임도 거부하고 마지막에는 여권발급까지도 불허했던 그 레짐의 중심이 이렇게 허탈하게 가다니.
서울의 봄이 가고 유학생들은 언론에 생생하게 보도되는 5·18 광주민중학살 사태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5월 31일에는 한인교회 주최로 본(Bonn)에서 기도회와 가두시위를 벌이는데 동참하였다. 이 무렵 AI 런던본부의 한국데스크에서 연락이 왔다. 1980년 5월 17일부터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중에 있는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 서신 복사본을 나에게 보내면서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 서한은 글씨를 깨알같이 하여 엄청난 양의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확대경 없이는 해독이 불가능한 정도이다. 한편의 서한을 번역하는데 며칠씩 걸렸다.
1980년 5월 21일 박사학위위원회는 내가 박사후보생(Doktorand)이 되었음을 결의하고 그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6월 5일에 이르러 일단 네 식구의 살림을 브레멘으로 옮기되, 보훔에서 어학코스를 계속해야 하는 아내만 기숙사에 한 학기 더 남기로 하였다. 나는 Doktorand로서의 의무는 아니지만 일반 학생들이 받는 수업에 참여하고 보고서도 제출했다. 논문의 연구범위는 독일 공동결정제도의 역사를 1848년 유럽혁명으로부터 출발하여 최근까지를 기술해야 하니 작업이 방대했다. 당시에는 PC가 발달하지 못해 올림피아 전동타자기로 작업했다. 중앙도서관 3층에 있는 객원연구실(Gastzimmer)을 배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법학분야 사서인 故 호벨만(Thilo Hobelmann) 선생을 잊을 수가 없다. 막바지에 장학금 지급이 종료되어 생활난이 가중되자 그는 주저없이 DM 10,000를 내어놓았다.
법률상담, 사회적 교류, 한국학교의 설립
실생활에서 수많은 법률문제에 부딪쳤다. 내가 직접 해결해야할 문제도 있었지만 한인유학생, 교민, 주재원뿐만 아니라 가까운 외국인 친구, 심지어 독일인들도 문제를 가지고 왔다. 법률용어는 역시 독일인들에게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주거보조금(Wohngeld) 수령 여부이다. 브레멘으로 옮기자마자 신청하였는데, 주택및도시건설국은 이를 기각한다는 통지를 보내왔다. 이유는 ”가정으로부터 당분간 떠나 있고, 해당주택은 당분간 사용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의제기를 하였는데, 또 기각되었다. 다시 이의제기와 기각결정을 반복한 끝에 드디어 이듬해 3월 22일자로 ‘변경통지’가 왔는데 월 DM 160의 주거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교민인 병아리감별사(Kückensortierer) 가정에서는 집세 문제로 집주인과 생긴 분쟁에 집주인 측 변호사가 집주인의 일방적 주장만 반복하고 변호사비용까지 요구하는 데 대해 점잖게 서면으로 타일렀다. 1983년 뮌헨(München) 대학교에서 오페라 연출을 공부하던 故 문호근 선생이 조언을 구해 왔다. 집주인과 위아랫층에 거주하는데 어린 아들이 저녁을 먹고 잠시 뛰었다 해서 항의와 해명이 오간 끝에 계약 해지 통고를 받은 사연이다. “당신의 서한은 여기에 요구되는 형식적 요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서한을 임대차계약 해지통고로 볼 수 없다”고 답변서를 작성하였다. 문 선생 가족은 그 집에서 공부를 끝내고 돌아왔다.
교통사고의 경우 한국 사람들이 우측우선 주행(Rechtsvorfahrt)을 모르고 있는데 안타까웠다. 신호나 교통정리가 없는 교차로에서 우측에서 진행하는 자동차가 우선권이 있다는 것은 독일 도로교통법(StVO) 제8조에서 규정하고 있고, 우리나라 도로교통법 제26조 제3항에도 엄연히 규정되어 있다. 함부르크 항에 입항한 콜롬비아 국적 선박에서 심야에 마약을 압수하고 선원들을 체포하였는데 나도 현장에 투입되었다. 판사가 체포영장 실질심사를 하는데 한국 선원들은 운반 혐의를 받고 있었다. 선서를 한 나였지만 그대로 통역만 했다가는 구속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어느덧 변호인이 되었다. 결국 이들은 석방되어 귀국길에 올랐다.
1982년 한인회 송년회를 겸한 총회에서 나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브레멘을 중심으로 반경 100km 내에는 간호사, 감별사뿐만 아니라 한인 입양아들이 산재해 있었다. 한인들은 2세를 위한 우리말 교육의 필요성에 크게 공감하였고, 양부모들은 입양아들이 우리말을 배우는데 절대적인 지지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부모 스스로도 우리말을 배우려는 열성을 보여 주었다. 학교는 주 교육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사단법인 브레멘 한국학교>(Koreanische Schule Bremen e. V.)라는 명칭의 주말학교로 1983년 4월 9일 개교하였는데, 공립학교의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개교소식과 독일학교와 공동으로 개최한 성탄행사가 현지 언론에 사진과 함께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2018년 9월 8일에 열린 개교 제35주년 기념식에 나도 참석하였다.
논문 재작성, 브레멘대학 연구소 근무, 석별의 정
그런데 1986년 12월 11일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마무리 단계의 논문 보따리를 자동차 트렁크에 넣고 피곤하여 몸만 집에 올라왔는데 이 보따리가 밤새 사라진 것이다. VW Passat Variant는 트렁크의 내용이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구조이다. 절망하고 있는데 유치원 학부형으로 절친한 마리온(Marjon)이 주선하여 지역TV방송인 Radio Bremen의 저녁 뉴스시간(Buten & Binnen)에 톱으로 출연하여 방송인터뷰까지 하였다. 결국 해를 넘겨 논문을 재작성하였고 마이어 교수가 꼼꼼히 살펴보는데 또 상당한 시간이 흘러갔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 8월 20일 개최된 구술시험(Colloquium)에서 논문이 통과되었다.
학위가 끝났으나 선뜻 귀국할 수가 없었다. 서울, 특히 모교의 사정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모교의 같은 전공 선배교수로부터 “과거지사 때문에 힘들 껄”이라는 답을 듣고는 귀국을 늦추고 추이를 살펴보기로 했다. 마침 브레멘대학교의 노동정치연구소(Akademie für Arbeit und Politik)에서 1987년 9월 1일부터 1년간 독일노총(DGB) 교육본부와의 협력사업인 “사회국가의 몰락/노동법의 해체” 연구과제를 함께 수행하기로 했다.
해를 넘겨 드디어 독일 땅을 떠나는 날이 왔다. 8년 10개월만이다. 송년회는 역시 마리온이 기획하여 1988년 8월 초 그 집 정원에서 열었다.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 교수 부부를 비롯하여 故 호벨만 선생 가족, 아이들 학부형, 늘 옆에서 도와준 동학자 Per Yuen(현재 변호사), 인도, 일본, 남미에서 온 친구들, 인근 지역에서 온 교민들, 한인 유학생들, 모두 귀국하는 우리 가족의 장래를 축복하여 주었다. 다음날 오전 내 아파트가 있는 Eduard-Bernstein-Str. 에는 선원 복장을 한 남성 20여명이 모였다. 인도/차도 경계석에 나란히 정렬하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합창을 한다. 마리온의 남편 크리스챤(Christian)이 지휘하는 브레멘 뱃노래 합창단(Bremer Shanty Chor)이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정중한 석별의 합창이었다.
재야학자에서 늦깎이 교수로
올림픽 준비가 한창인 1988년 8월 8일 귀국하니 세상은 온통 달라져 있었다. 유학 전에는 노동법 전공자들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기업가들이 여기저기서 자문을 구해왔다. 생산성본부가 타워호텔에서 주최한 강연에 연사로 초청되었는데 300여명의 CEO들이 운집해 있었다. 정부가 국책연구기관으로 설립한 한국노동연구원의 창립 멤버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1989년 하반기에는 노사관계고위지도자과정을 개설하고 주임교수를 맡아 노사 양 당사자와 공익대표자들을 수강생으로 모집했다. 1970년대에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비공개로 하던 교육을 이제 공개적으로 하는 감격이 앞섰다. 노동계와 기업인들은 고위임원급으로 하고, 공익대표로는 13대 초선의원들 중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노무현, 이인제, 이협 의원 등을 참가시켰다.
1991년 8월 31일 한국노동연구원을 떠나 자유로운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얼마 후 서초동에 산업사회연구소를 오픈하였다. 이 시절에는 재야의 학자로서 12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대학원생들은 학교 구별 없이 토요일 오후 2시 연구소로 모아 합동강의를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자들이 이른바 ‘이광택 사단’(?)을 형성하였다. 이때가 나로서는 황금기였다. 논문도 가장 활발히 썼고 언론에도 자주 등장하였다.
1994년 9월 국민대학교에 자리를 잡자마자 국제노동사회법학회(ISLSSL) 제14차 세계대회의 조직위원장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일에 빠져들었다. 롯데호텔에서 개최되었는데 공식 언어가 6개 국어, 참가자가 2,000명에 육박하여 아직까지도 이 기록은 깨어지지 않고 있다.
시민운동, 국제활동, 사회봉사
해방 직후부터 민주노동운동가로서 평생을 헌신한 故 김말룡 선생은 나의 연구소를 수시로 방문하여 노동법에 관한 자문을 구하였다. 1996년 10월 3일 선생이 등산길에 실족사하자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아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모셨다.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을 맡아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 도중 의문사한 은사 최종길 교수의 사인을 밝혀 2006년 2월 14일 국가가 유족에게 18억 4800여만 원을 배상하라는 법원의 최종 판결을 이끌어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후신인 함께일하는재단 상임이사로 미국, 캐나다, 독일,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 선진 사례를 연구하였고,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네시아, 남아공, 르완다, 남수단, 페루 등지의 사회적기업 육성을 지원하였다. 2005년~2009년 (사)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았는데 시민모금을 통해 버들다리에 전태일 동상을 건립하고 주변 청계천변(전태일거리)에 4천여 기부자의 이름과 격문을 새긴 동판을 설치하였다.
국민대학교에서 20년 가까이 봉직하는 동안 공직, 학장이나 본부 보직은 맡지 않았다. 그 대신 한국노동법학회, 한국사회법학회,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등 주요 학회의 장을 역임하였고 2000년 9월부터 ISLSSL 집행위원을 하고 있다. 법학교수로서 가장 고난도의 작업이라면 최고법원이 내린 판결에 대해 비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법학교수는 판사보다도 엄격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비교적 많은 판례평석을 썼다. “Much law, little justice”라는 영국의 法諺을 믿는다. ISLSSL 대회에는 제13차 세계대회(1991 아테네)에서부터 제22차 세계대회(2018, 토리노)에 이르기까지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주제발표를 하였다.
2017년 이래 (사)한국ILO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창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이 ILO 협약 중 4개의 핵심 협약(Core Conventions)을 비준할 것을 역설하였다. 경실련 (사)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다솜이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2020년 3월(사)언론인권센터의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한편 남성 성악가 70여명의 앙상블인 프리모깐딴떼의 단장을 맡아 국내외 공연활동을 전개하였으며, 2010년 명지대학교 콘서바토리에서 음악학사를 취득하고, 국제하이든콩쿠르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정년퇴임을 앞둔 2013년 11월 11일 <법학교수가 부르는 ‘청년의 노래’ 바리톤 이광택 교수 독창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행사를 통해 청중들이 정성을 모아 기탁한 쌀 454kg을 성북구의 이웃들에게 나누었다.
